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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2. 12世 〉14. <부정공>통사랑행예빈시봉사휘엄묘표(通仕郎行禮賓寺奉事諱儼墓表)
1. 문헌 목록 〉12. 12世 〉16. <부정공>야은처사휘간묘갈명(野隱處士諱侃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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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부정공>애죽당공휘건묘표(愛竹堂公諱健墓表)
愛竹堂公諱健墓表 公諱健字汝剛號愛竹堂官訓練院直長趙氏系出玉川以麗朝光祿大夫檢校門下侍中諱璋爲鼻祖三傳而有諱元吉號農隱與圃隱鄭先生及偰芸亭諸賢定策立恭讓王錄勳封玉川府院君諡忠獻享武夷祠生諱瑜號虔谷官典農寺副正麗亡入杜門洞我太宗累徵以官終辭不出當短喪之日獨行三年廬墓世宗旌其門曰孝子前副正趙瑜之閭盖並褒其忠孝也肅宗三十二年丙戌享謙川祠生諱崇文官節度使贈兵曹判書諡節愍生哲山贈敎官當端廟丙子與六臣謀復上王父子同殉兩世並餟食于莊陵壇及謙川祠高祖諱瓊號杜門丙子之禍謫幸州成宗朝宥還坎壈而終曾祖諱碩珩啓功郎祖諱倫號賞春堂被除恩從仕郎行慶基殿參奉考諱潤漣壽階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妣淑夫人慶州金氏公嘉靖己丑二月三日生自幼天性純厚容儀端莊不戯慢不暴怒處己以正對人以恕以孝事親有命無違雖瑣微事必咨禀而行雖當爲之事父母不許則不爲見人之善喜而敬之見人之不善隱而不現奉祭祀極其誠敬接賓客極其誠力當時世稱君子焉竟以萬曆壬寅九月三十日考終于家葬于谷城竹谷山水洞亥坐原配令人光山金氏生于庚寅卒于萬曆庚寅九月十五日墓祔有一男一女元老女適善山柳益清孫晉河餘不盡錄嗚呼公以名門後裔禀粹美之質服詩禮之訓不馳騖於名利之場惟以種德行義爲畢生事而尤勤尤篤雖不顯揚於當時然其潛德幽光實有可以亘百世不泯者也其後孫東祚訪余於順天校宮而言曰吾十一代祖考愛竹堂公墓具石儀奉歲祭已久而尚闕表隧之碑今將謀竪願賜一言而銘之余在同族之地聞其世德年已久矣不敢以不文辭敍此如右以塞其請云 光復後辛未十一月 冬至節 從後孫 東胄 撰 애죽당공휘건묘표(愛竹堂公諱健墓表) 공(公)의 휘는 건(健), 자(字)는 여강(汝剛), 호(號)는 애죽당(愛竹堂)이신데 벼슬은 훈련원직장(訓練院直長)을 지내셨다. 조씨는 옥천(玉川)을 본관으로 하는데 고려 때 광록대부 검교문하시중(光祿大夫檢校門下侍中)을 지내신 휘 장(璋)을 시조로 한다. 삼대를 내려와 휘 원길(元吉)이란 분이 계시니 호는 농은(農隱)이시다. 포은(圃隱) 정 몽주(鄭夢周)선생과 운정(芸亭) 설장수(偰長壽) 등 여러 현인과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공으로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지셨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으로 무곡사(武曲祠)에 배향되셨다. 이 분이 휘 유(瑜)를 낳으셨는데 호는 건곡(虔谷)이시며 벼슬은 전농시부정(典農寺副正)을 지내시다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셨다. 우리 태종(太宗)께서 여러 차례 벼슬로 부르셨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며, 당시 상복(喪服)기간을 줄여서 하는 때를 당하여 홀로 三년동안 시묘살이를 하여 세조 (世宗)께서 효자 전부정 조유의 정려(孝子前副正趙瑜之閭)라는 정려(旌閭)를 내리셨으니 이는 대개 그분의 충과 효를 아울러 표창한 것인데 숙종(肅宗) 三十二년 병술(一七○六)에 겸천사(謙川祠)에 배향되셨다. 이 분이 휘 숭문(崇文)을 낳으셨는데 벼슬은 절도사(節度使)를 지내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增)되셨으며 시호는 절민(節愍)이시다. 이 분이 휘 철산(哲山)을 낳으시니 교관(敎官)에 추증되셨다. 단종(端宗) 병자년(一四五六)을 당하여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단종을 복위(復位)시키려다가 부자(父子)가 함께 순절하시어 두 분 모두 장릉단(莊陵壇) 및 겸천사에 배향되셨다. 고조의 휘는 경(瓊), 호는 두문(杜門)이신데 병자년의 화란 때 행주(幸州)로 귀양을 가셨다가 성종(成宗)때 사면(赦免)되어 돌아오시어 불우(不遇)하게 일생을 마치셨다. 증조의 휘는 석형(碩珩)이신데 계공랑(啓功郎)을 지내셨으며, 할아버지의 휘는 윤(倫), 호는 상춘당(賞春堂)이신데 종사랑(從仕郎)으로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을 제수하셨다. 아버지의 휘는 윤련(潤漣)이신데 수계(壽階: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벼슬을 주는 것)로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를 제수하셨으며,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이시다. 공께서는 가정(嘉靖) 기축년(一五二九) 二월 三일에 출생하셨는데 어려서부터 천성이 순후하고 용의가 단정하셨으며, 놀이를 좋아하지 않고 성을 내지 않는 등 처신을 바로하고 남을 잘 용서하셨다. 효도로써 부모를 섬기어 부모님 명을 거역하지 않아 비록 하찮은 일이라도 반드시 아뢴 후에 행하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도 부모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하지 않으셨다. 또 남의 선행(善行)을 보면 기뻐하면서 존경하고 남의 악행(惡行)을 보면 감추어 주면서 드러내지 않으셨다. 선대의 제사를 정성껏 모시고 손님을 공경하여 정성껏 힘닿는 대로 접대하여 당시 사람들이 군자(君子)라고 하였다. 마침내 만력(萬曆) 임인년(一六○二) 九월 三十일에 집에서 돌아가시어 곡성 죽곡면(竹谷面) 상죽곡 산수동(山水洞) 해좌(亥坐)에 장례하였다. 배위(配位) 영인(令人) 광산김씨(光山金氏)는 경인년(一五三○)에 출생하시어 만력 경인년(一五九○) 九월 十五일에 돌아가셨는데 부묘(墓)이다. 一남一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원로(元老), 딸은 선산(善山) 유익청(柳益清)의 손자 유진하(柳晉河)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명문 집안의 후예로서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 나셨으며, 예의의 가정교훈을 받으셔 명리(名利)를 탐내지 않으면서 오직 덕(德)을 심고 행실을 바로 하는 것을 일생의 사업으로 삼아 부지런히 행하셨으니 비록 당시에는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그 숨겨진 덕행과 빛은 실로 백세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후손 동조(東祚)가 나를 순천향교(順天鄉校)로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저의 十 一대조 애죽당공의 묘소에 석물을 갖추고 시제를 모셔온 지 오래인데 아직껏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비석을 세우고자 하오니 한 말씀 기록하여 주시오」 하였다. 나는 일가로서 그분의 세덕(世德)을 들어온 지 오래여서 감히 글을 잘 짓지 못한다고 사양하지 못하고 이상과 같이 써서 책임을 때운다. 光復後辛未十一月 冬至節 從後孫 東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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